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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에 내리는 꿀비처럼, 전통주와 지역을 함께 살릴 순 없을까?『꿀비』 이경일 대표

서울 사는 청년들이 지역으로 내려갔다.
누군가에겐 그리운 고향이었고, 누군가에겐 낯선 타지였다.

지역을 떠나는 사람들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지역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지역과 어우러져야 할까?
지역과 도시는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며 이웃이 되어야 할까?

그리고 잊고 있던 지역의 가치는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 방법을 지역의 가치를 잃은 자원에서 찾았다.
누군가는 그 방법을 지역의 가치를 잃은 문화에서 찾았다.
누군가는 그 방법을 지역의 가치를 잃은 공간에서 찾았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방법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가치에서 찾았다.

경북 상주시 아천1리 마을(사진: 소소리 연구소 제공)

서울시와 각 지자체가 협력해 2019년 9월부터 진행한 〈넥스트로컬(NEXT LOCAL)〉 사업이 지난 4월 마무리되었다. 넥스트로컬은 지역의 자원을 연계·활용하거나, 지역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창업모델을 발굴하는 프로젝트다. 1기 사업을 마친 넥스트로컬은 현재 2020년 2기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다.

이번 호 특별기획에서는 넥스트로컬 1기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청년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지역의 미래를 담아 보았다.

 

넥스트로컬 2기
모집 대상: 서울시 거주청년(만19-39세)
활동 기간: 2020년 6월말부터 2021년 2월초
신청 기간: 2020. 5. 11(월) 09:00 ~ 2020. 6.7(일)
신청 방법: www.seoulnextlocal.co.kr 온라인 접수

 

예부터 귀한 손님이 오면 중국과 일본에서는 좋은 술을 사서 대접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직접 빚은 술을 대접했다. 오랜 세월 전해지는 고유의 비법으로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은 우리의 문화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저술한 농촌경제 정책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160개가 넘는 양조법이 소개되어 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술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1909년 통감부는 주세법을 시행해 술에 세금을 부과하고 제조 면허를 받은 자만이 술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국권 피탈 후 총독부는 더욱 강력한 주세령(1916년)을 시행했다. 만들어 먹는 술에는 사 먹는 술보다 더 높은 세금이 매겨졌다. 자가용 술의 제조자가 사망하면 자손 등은 면허를 상속받을 수도 없었다.

1916년 자가용 양조 면허를 받은 사람은 30만여 명. 당시 조선의 인구가 1,000만 명 정도였으니 집집마다 술을 빚었던 셈이다. 하지만 일제의 통제 속에 자가용 양조 면허자는 1929년 265명으로 줄었고, 1934년에는 1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마저 사망하면서 집에서 술을 빚을 수 있는 면허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지역마다, 집안마다, 빚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향을 담는 우리의 전통주 문화는 이렇게 사라져 갔다.

충남 금산 진산면에 위치한 진산주조장

 

곡식에 내리는 꿀비처럼, 전통주와 지역을 함께 살릴 순 없을까?

곡식이 꿀처럼 달게 받아먹을 비. ‘꿀비’는 농작물이 자라는 데 꼭 필요한 때에 맞춰 내리는 비를 말한다. 지난해 11월 창업한 『꿀비』는 지역을 기반으로 영세 양조장과 협력해 전통주의 가치를 높이는 일을 하고 있다.

“지역, 문화, 우리 술. 잊히고 있는 가치에 내리는 단비가 되고 싶습니다.”

광고 일을 하던 이경일 씨는 선배가 창업한 『청년시대』 일을 도우면서 전통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청년시대가 하는 일은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것. 그중 하나가 우리 술이었다. 경일 씨는 2014년부터 ‘막걸리 유랑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리 술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우리술문화원 향음(이하 ‘우리술문화원’)』에서 전통주 공부를 시작했고, 양조전문가 과정에도 등록했다. 전통주 문화와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 1년 이상 술을 빚었다. 그러다 우리술문화원에서 일하게 됐다. (꿀비의 이경일 대표는 현재 우리술문화원의 부원장이기도 하다.)

“우리술문화원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지역의 양조장들과 교류할 일이 많아졌어요. 그럴 때마다 큰 자본이 들어간 몇 곳을 빼고는 너무 영세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전통주와 지역을 함께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8월 경일 씨는 고향 금산의 한 양조장을 찾았다. 22년 전 할아버지 단골 양조장이었다.

“규모가 예전의 절반 정도로 줄어 있었어요. 지역을 떠나 전통주를 생각할 순 없잖아요? 전 제 고장에서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이 공간을 살려보고 싶었습니다.”

꿀비 이경일 대표

 

노사업가와 청년이 함께한 ‘옆동네술 프로젝트’

충남 금산 진산면에 위치한 진산주조장. 1927년 문을 연 이곳은 지역에서 100년 가까이 전통주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매출 감소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70대에 접어든 원상덕 대표의 시름은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30대 청년 경일 씨가 찾아왔다. 청년은 막걸리를 고급화해 유명 식당에 공급하자고 했다. 감미료 같은 화학 재료를 빼고 쌀과 누룩, 물로만 막걸리를 빚자고 했다. 선뜻 수긍하지 않는 원 대표에게 청년은 자신의 레시피로도 막걸리를 빚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쁘지 않았다. 청년은 요즘 잘 나가는 술, 새로 나온 술을 들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주조장을 찾아왔다. 그렇게 함께 20여 종의 술을 맛보았고, 때로는 원 대표의 방식대로 때로는 경일 씨의 방식대로 술을 빚었다.

“양조장이 안착하려면 1년 이상은 돼야 한대요. 사계절을 보내며 온도조절도 되고, 술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균들도 쌓이거든요. 양조장만의 맛이 잡히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거죠.

어르신과 함께 하는 과정도 비슷했습니다. 1년까진 아니지만,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나서야 마음을 얻을 수 있었죠. 제가 처음 갔을 때 어르신은 제가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주무시고 계셨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께서 직접 레시피를 개발해 연락을 주시기도 해요.”

3개월 뒤 경일 씨는 넥스트로컬을 통해 꿀비를 창업하고, 원 대표와 함께 본격적으로 전통주 개발에 들어갔다. 일명 ‘옆동네술 프로젝트’. 20번도 넘게 레시피를 수정하고, 시제품을 테스트하고, 디자인을 개발했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해가 바뀌고 따스한 봄날이 되어 꿀비와 진산주조장이 함께 만든 ‘옆동네술 : 진삼탁주’가 나왔다. 쌀과 누룩, 금산인삼으로만 만든 프리미엄 탁주다.

꿀비와 진산주조장이 만든 ‘옆동네술 : 진삼탁주'

 

막걸리가 싸구려 술이라고? 프리미엄 탁주로 지역 양조장과 동반 성장

현재 우리나라에선 1,200곳이 넘는 양조장에서 탁주(막걸리), 청주(약주), 증류식 소주 등 2,000여 종의 전통주가 생산되고 있다. 연간 14조 원에 이르는 국내 주류시장에서 전통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지만, 우리 술을 주제로 한 플랫폼도 여럿 등장하고 있다. 젊은 층에선 매달 다양한 우리 술을 배송해 주는 전통주 구독 서비스도 인기다.

“전통주를 사랑하는 입장에선 반갑죠. 그런데 기존 서비스는 이미 완성도 높은 술을 소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저희는 1천 원짜리 막걸리 팔던 양조장과 협업해 2만 원에 팔리는 술을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유통과 전달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부가가치를 높여 지역의 영세 양조장과 함께 성장하는 거죠.”

새롭게 개발된 술은 온/오프라인 유통망을 통해 판매할 계획이다. 전통주(무형문화재 보유자나 식품명인이 만드는 민속주, 지역농산물로 빚은 지역특산주)의 경우, 2017년 6월 판매규제가 완화돼, 주류사를 통하지 않고 바로 유통할 수 있고, 온라인 판매도 가능하다.

“우선은 마니아층을 공략하려고 해요. 대중적인 시장도 욕심 안 나는 건 아니지만, 술에 대한 접근 자체가 다르거든요. 가격은 너무 비싸고, 누룩 냄새도 아주 강하다고 느낄 겁니다. 감미료 없이 재료로만 단맛을 내고 신맛을 내려면 단가를 낮출 수가 없어요. 무리해서 낮출 생각도 없고요. 오히려 막걸리 자체를 안 드시는 분들께 한 번쯤 권해보고 싶습니다. 일종의 프리미엄 전략인데, 그렇게 우리 시장을 만든 뒤에 조금씩 키워나가려 해요.”

브랜딩 전문가인 박선욱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의 자문을 받으며 탁주 용기와 라벨 디자인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술문화원에서 알게 된 박 교수님은 전 세계에 한국의 전통주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세요. 지난해엔 ‘3.1운동 100주년 기념술’ 작업도 하셨죠.

‘술은 눈으로 마신다’고도 하잖아요? 전통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브랜딩과 패키징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좋은 술’이라는 전제 하에요. ‘술다운 술’이 세상에 나가야지, 술의 질은 떨어뜨린 채 멋진 디자인으로 포장만 하는 건 세상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진삼탁주 라벨

 

와인을 마시는 나는 멋있고 막걸리를 마시는 나는 멋없다?

와인을 증류하면 브랜디가 되고, 맥주를 증류하면 위스키가 되고, 막걸리를 증류하면 소주가 된다. 사실상 똑같이 밑술 역할을 하는 발효주인데 막걸리만 저평가되어있는 현실이 이 대표는 안타깝다고 했다.

“막걸리뿐 아니라 우리 것에 좀 인색한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소주의 경우에도, ‘토끼 소주(Tokki soju)’라고 들어보셨어요? 미국인 브랜든 힐이 뉴욕에서 파는 전통 소주(누륵을 발효시켜 만든 밑술을 증류시켜 제조한 소주)인데, ‘뉴욕 여행 인증 술’이라 불릴 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높아요. 그런데 막상 국내에선 소주하면 희석식 소주(에탄올인 주정을 물에 타 감미료 등 첨가물을 넣어 제조한 소주)만 떠올리죠.”

와인을 마시는 나는 멋있게 느껴지고, 막걸리를 마시는 나는 멋없게 느껴지는 걸까? 그러고 보니 국내 유명 한식당에서도 전통주 대신 와인을 파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한식에는 한국술인데 말이죠(웃음). 전에 우리술문화원에서 충남 홍성의 양조장과 청주를 개발했는데, TV에도 나오는 유명 셰프의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납품했습니다. 일부러 고급 한식당부터 공략했어요. 한순간에 바뀌진 않겠지만 더 많은 곳에서 전통주를 즐길 수 있도록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죠.”

 

우리 청주를 왜 코리안 사케라 부를까?

‘우리 술’ 알리기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술 문화’ 알리기

“우리의 청주를 왜 ‘코리안 사케’라고 불러야 할까요?”

질문을 던진 이 대표는 우리 술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술 문화를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브랜딩을 도와주셨던 박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김치를 알리기보다는 김장 문화를 알려야 한다”고. 술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이 술이 좋아’가 아니라 ‘이런 술 문화 어때? 직접 빚어 봐도 좋고. 빚은 술을 마셔 봐도 좋고’ 하는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술을 알리기보단 일제강점기 이후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우리의 술 문화를 알리는 거죠.”

이 대표는 "우리 술을 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술 문화를 알리는 것"이라 했다. (사진: 전통주갤러리)

 

지역을 닮고 사람을 닮는 우리 술의 매력

금산에서 시작한 옆동네술 프로젝트는 양평, 철원, 강진 등 다양한 지역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전통주에는 지역이 담겨 있고, 사람이 담겨 있어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토양도 다르고 기온도 다르니 지역에 따라 술도 다르게 나옵니다. 금산의 경우는 내륙분지라 주변 지역보다 온도가 1℃ 정도 낮아요. 그에 비에 강진은 나뭇가지만 꽂아도 열매가 나올 것 같더라고요. 금산은 금산 같은, 강진은 강진 같은 술이 나오겠구나 생각했죠.

또, 똑같은 지역에서, 똑같은 재료를 갖고, 똑같은 방식으로 술을 빚어도, 빚는 사람에 따라 다른 술이 나와요. 빚는 사람을 닮은 술이 나오죠. 지역과 문화와 사람을 담고 또 닮아가는 것. 이게 전통주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꿀비 이경일 대표

 

저평가되었을 뿐 세상에 가치 없는 건 없다

이 대표와 이야길 나누다 보니 전통주를 살리는 것과 지역을 살리는 것, 왠지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우리술문화원에서 서울시, 종로구와 함께 실버세대를 대상으로 ‘주현사(酒賢師)’라는 우리 마을 전통주 해설사 양성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총 43분이 참여했는데, 교육과정 중 인터뷰를 통해 교육생들의 고향에서는 술을 빚을 때 쌀로 빚었는지 밥으로 빚었는지, 모내기할 땐 술이랑 감자전을 먹었는지 팥전을 먹었는지 같은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엮었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50년, 100년, 시간이 흐르면 우리에게서 희미해지는 기억을 이어줄 수 있을 거예요.

술은 하나의 매개체고 우리가 하는 일은 사실 문화를 잇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옆동네술 프로젝트도 마찬가지고요. 저평가되었을 뿐 세상에 가치 없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술, 우리 문화, 우리 지역. 무엇이 되었든 본연의 가치가 있는데,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서, 그 가치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꿀비

 

김푸르매 기자  gracia0420@seconom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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