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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이들의 경험을 확장하는 따뜻한 기술<함께, 바라보다: 장애와 비장애, 교육과 기술이 가야할 길>
10년 만에 온 편지

동양화가 취미였던 직장인 문선주 씨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한참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다. 못 일어날 것이라던 의사의 말과는 다르게 기적적으로 깨어난 문 씨. 하지만 병상에 누워있길 10년째, 척수마비로 인해 몸을 가눌 수 없었고, 장시간 혼수상태였던 터라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시 무언가를 쓰고 싶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는 그립플레이를 찾았고, 몇 번의 상담과 측정을 마친 뒤, 필기를 도와주는 보조기구 플레이그립이 제작되었다. 드디어 플레이그립을 착용한 문 씨, 10년 동안 참아온 말을 종이에 쓰기 시작했다.

“여보 사랑해”

오랜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만 되뇌던 한 마디. 글을 쓰는 데까지는 10년이 걸렸지만, 그 마음을 전달하는 데는 1분이면 충분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편지

엘리자베스는 두 살 때, 화재 사고로 인해 삶이 송두리 째 바뀌었다. 남매 중 유일하게 생존했지만, 화상으로 인해 얼굴이 변하고 손과 발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고통, 화재 사고 트라우마로 인한 악몽, 계속되는 수술. 웃음을 잃은 딸을 보며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했고, 마침내 한국의 한 병원에서 손가락은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수술을 마치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은 잠시, 손가락 근육이 굳어 연필을 쥐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엘리자베스에게 선물이 찾아왔다. 그립플레이의 맞춤형 보조기구 플레이그립이었다. 이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엘리자베스. 연필을 잡으면서 그에겐 꿈이 생겼다.

“열심히 공부해서 제가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것처럼 장애인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될래요.”

 

더 많은 이들의 경험을 확장하는 따뜻한 기술

2017년 11월 4일(토)부터 17일(금)까지 서울시 종로구 JCC 아트센터에서 장애와 비장애가 함께 교육받을 수 있는 교보재 (敎補材) 및 작품 전시회 <함께, 바라보다: 장애와 비장애, 교육과 기술이 가야할 길>이 열렸다.

전시를 주관한 『그립플레이(griplay)』는 ‘기술을 통한 교육적 경험의 공유’를 미션으로 하는 예비사회적기업이다.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맞춤형 보조기구를 제작·보급한 것을 시작으로, 시각장애 아동을 위한 태블릿 PC기반의 촉각 교보재, 발달장애 아동을 위한 loT LED 동화책 등을 개발하며 장애·비장애와 상관없이 모두 함께 교육받고 상상할 수 있도록 기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그립플레이의 대표적인 보조기구 플레이그립(PLAY-GRIP)은 절단, 뇌병변, 척수, 근육 장애 등으로 손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장애인들을 위해 필기용으로 개발되었다. 사용자들은 자신에게 딱 맞게 제작된 플레이그립을 손에 끼우고, 연필 등 필기구를 장착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혼자 힘으로 필기구를 잡기 힘든 장애인들에게 필기보조기구는 꼭 필요한 제품이다. 실제로 2013년부터 「장애아동 학습보조기구 지원법령」에 따라 장애아동이 있는 학교는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의무적으로 장애보조기구를 구입해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보조기구의 확산 및 보급에는 어려움을 겪어 왔다. 제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했기에, 사용자의 체형에는 맞지 않고 가격은 비쌌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립플레이는 기존의 대량생산 방식을 탈피해 3D프린터로 제작한 사용자 맞춤형 필기보조기구 플레이그립을 선보였다. 스마트 ICT 기술로 탄생한 플레이그립은 더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혁신성은 물론 품질도 인정받아 지난 해,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상용보조공학기기 선정품목에 등록되기도 했다.

장애아동들이 필기보조기구로 그린 작품들

 

기술을 통해 확장된 경험, 세상과 소통하다

그립플레이는 특히 장애아동들에게 플레이그립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필기보조기구를 통해 장애와 상관없이 모든 아이들에게 질 높은 교육을 균등하게 제공하는 것이 보다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도구를 쥐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장애학급을 돌며 ‘찾아가는 오픈스튜디오’를 운영했고, 아이들에게 필기보조기구를 이용한 그림 교육을 제공했다. 나아가 기술과 도구를 통해 확장된 아이들의 경험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전시회를 열어 필기보조기구로 그린 아이들의 작품을 소개했다.

<함께, 바라보다: 장애와 비장애, 교육과 기술이 가야할 길>은 <보조기구로 그리는 따뜻한 세상>(2016년 3월), <USING ANOTHER HANDS; 브레멘음악대> (2017년 4월)에 이어 그립플레이가 선보이는 세 번째 전시회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49명의 장애아동들이 필기보조기구로 그린 따뜻한 세상과 함께 성병권, 이준상, 박민정, 이효열, 이두석 등 참여 작가들의 협업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보조기구의 생산 공정에 대한 기술적 이해를 돕기 위해 플레이그립의 제작과정도 소개되었다.

전시에서는 맞춤형 보조기구의 제작과정도 소개되었다.

 

장애와 비장애, 교육과 기술이 가야할 길

전시회에서는 3D 프린팅 외에도 신기술을 활용한 예술 작품과 아동 교육 프로그램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 중 비치된 스마트폰으로 작품을 보면 Laser CNC로 만든 배경에서 전시의 주제인 동화 『브레멘음악대』를 AR로 감상할 수 있는 이두석 작가와 그립플레이의 협업 작품 ‘AR 브레멘 동화'는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시각장애 아동 등을 위한 ‘SMART STAMP 교육 어플리케이션’과 발달장애 아동 등을 위한 ‘SMART LED 교육 어플리케이션’ 역시 장애, 비장애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선사했다. 관객들은 SMART STAMP 교육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3D 프린터로 출력된 동화책의 동물들을 만지면서 읽을 수 있는 동화부스를, SMART LED 교육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책을 읽어주면 동화 캐릭터에 따라 조명이 바뀌는 동화부스를 체험할 수 있었다.

전시장 곳곳에는 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작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와 똑같은 신발을 신은 계단 위의 의족 그리고 아름다운 조명 아래 위치한 휠체어. 이들은 우리에게 ‘장애를 다름이 아닌 익숙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장애, 기술, 교육, 예술은 각각 다른 분야지만, 모두 ‘사람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험의 크기만큼 꿈을 꿀 수 있기에, 우리 모두에게는 장애와 상관없이 공평하고 다양한 경험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두석 작가와 그립플레이의 협업 작품 ‘AR 브레멘 동화’

 

| 그립플레이 | www.facebook.com/griplay

사진 김푸르매

오윤주 기자  koala@seconom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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